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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친왕의 잊혀진 정혼녀 민갑완!파혼당한후 '50여 년 간 망.명.과 빈곤의 삶을 눈물로 감내하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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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jun1989 2021. 3. 18.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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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갑완이란 여인이 있었다. 조선 왕실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비(妃)로 간택되었지만, 일제의 방해로 끝내 결혼하지 못한 인물이다.

구한말에 비극적인 삶을 산 여인들이 많았다. 덕혜옹주가 그런 인물이고, 민갑완은 그보다 더 슬픈 삶을 산 여인이다.

 

영친왕이 누구인가. 고종의 7번째 아들이자 순종의 이복동생이다. 생모인 엄상궁은 영친왕을 낳은 뒤 후궁이 됐고, 대한제국의 황귀비 자리에 올랐다. 영친왕은 10살 때인 1907년 황태자로 책봉됐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손에 이끌려 일본유학을 떠났다. 영친왕은 도쿄에서 일본왕족이던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와 정략결혼 했다.

영친왕의 정혼녀 민갑완의 상하이 망명시절 모습. 어릴 적부터 영특해서 10살 때인 1907년 150대 1의 경쟁을 뚫고 영친왕의 악혼녀가 됐다.

 

파혼당한후 상해로 망명…평생 결혼 않고 한 많은 삶 살은 비운의 여인

영친왕이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던 1907년의 봄, 영친왕의 나이는 10살이었다. 경운궁(덕수궁)에는 영친왕의 배필을 맞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영친왕의 친모 엄 귀비가 영친왕의 배필을 구하기 위해 조선의 모든 여성을 대상으로 간택령을 내렸다.

 

조선 왕가에서 왕세자의 배필을 구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행사였다. 간택의 첫 단계는 전국에 결혼을 금한다는 금혼령이다. 왕은 나라의 모든 처녀를 배필로 삼을 수 있다는 얘기이다. 그러면 딸을 둔 집안에서는 처녀의 사주단자를 왕실에 보낸다. 그렇다고 전국 모든 처녀의 사주단자가 오는 것은 아니다. 주로 왕비가 되고 싶어 하는 명문가 규수의 사주단자가 온다. 그 중에서 3간택의 절차, 즉 3번의 심사를 통해 왕세자의 배필을 최종 낙점하는 것이다.

 

엄격한 심사와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 영친왕과 같은 날 태어난 이쁘고 똑똑한 아가씨, 민갑완이 배필로 정해졌다.

 

민갑완은 왕실의 여러 어른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정혼을 약속하는 신물(信物)인 가락지를 받았다. 이제 궁궐에서 가례(嘉禮)일을 받아 예식만 치러지면 순종의 뒤를 이어 조선의 왕으로 등극할 영친왕의 비, 조선의 국모가 되는 것이다.

1907년 12월 영친왕이 일본에 유학을 떠났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영친왕의 결혼을 방해하기 위해 유학이란 구실로 어린 왕자를 볼모로 잡아간 것이다.

 

영친왕이 유학을 떠난지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민갑완도 영친왕도 이제 20살의 과년한 여인이 되었다. 민갑완은 약혼자가 돌아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차에 궁궐에서 일단의 상궁들이 집으로 찾아왔다.

 

이제 올 것이 왔구나! 택일 때문에 왔겠지? 그런데 이게 웬일 인가! 혼약을 파기한다는 소식이 전해 졌다. 집안이 난리가 났다. 이 일의 충격으로 민갑완의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6개월후 아버지도 돌아가셨다.

영친왕이 일본 황족인 마사코(方子)와의 결혼이 확정된 후에, 예정된 혼약자를 그대로 두었다가는 나중에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일본의 강요에 파혼된 것이다.

 

왕실 법도상 한 번 왕비로 간택된 여인은 평생 독신으로 살아야했다.

 

민갑완은 마음의 정표인 가락지를 간직하겠다고 간곡하게 청을 올렸지만 궁녀들은 약혼반지마저 빼앗아 갔다.

 

“아버지(민영돈)가 본래 청렴한 분이었기 때문에 생전엔 남겨둔 재산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아버지가 작고한 후에는 살던 집까지 팔아버리고 작년에 내(이기현) 집으로 와서….”

 

그러니까 민갑완 집안은 파혼 이후에 아버지까지 작고하는 바람에 풍비박산 났으며, 겨우 외숙의 집으로 옮겼다는 것이었다.

 

민갑완은 조선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돌아오겠다는 각서와 재산을 공탁하고 해외로 망명을 감행했다. 상하이 임시정부 요인어었던 김규식(金奎植) 선생이 계획한 일이라고 한다. 김규식은 민갑완에게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권고했지만, 민갑완은 “나의 희생으로 만사가 평온하기를 바랄뿐”이라면서 거절했다.

 

그 세월동안 서울의 민갑완은 이제나 저제나 약혼남 영친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민갑완의 회고록을 보자.

 

“여자의 운명이란 이런 것인가. 10여 년 전에 정해놓은 그 분을 위해 문밖도 마음대로 못나가고, 사람도 친척 외에는 피하면서 살자니 정말 고통스러운 생활이었다. 난 독수리가 수탉을 물고 동쪽 하늘로 휙 날아가는 꿈을 꾸었다. 수탉은 피를 철철 흐리고, 나는 소리를 지르며 발을 구르고…. 흉몽이었다.”

...

그렇다면 영친왕의 정혼녀였던 민 규수는 과연 누구인가. 정혼녀로 간택된 이후 61년 간이나 수절해야 했던 비운의 여인은 누구인가. 

 

민 규수는 민영돈(1863~1918)의 딸인 민갑완(1897~1968)을 일컫는다.

아버지 민영돈은 명성황후 민씨의 먼 조카뻘이었고 동래부사와 미국·영국·벨기에 공사를 거친 인물이었다.

 

여흥 민씨 가문은 명성황후를 비롯해 조선시대 8명의 왕후를 배출한 조선시대 대표적인 명문가이다. 영친왕과 같은 날에 태어난 민갑완, 이 아기는 앞으로 자기에게 펼쳐질 인생의 험하고 아픈 일들을 짐작이나 했을까?

 

민갑완은 남동생과 중국 상해로 가서 길고 긴 고난의 삶을 살게 된다. 모든 것을 잊고 새 출발하고자 의사가 되기 위한 절차를 밟았으나 그마저 중국주재 일본 영사의 방해로 좌절되었다. 일본의 감시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독서와 뜨개질뿐이었다.  딱 한 번 얼굴을 보고 키를 재봤던 남편 때문에 망명을 하게 된 것이다.

 

민갑완은 상하이 망명 시절 몇몇 남자의 유혹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 때마다 가문을 생각했단다.

이승만의 청혼도 거절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참아라. 너 하나로 가문을 더럽히고 만다면 그 누명은 자손만대까지 지속될 것이다. 청춘의 고뇌를 참아라.’

 

아버지 생전에 “빨리 다른 가문 남자와 혼인하지 않으면 어떤 중죄라도 받겠다”는 서약서를 써주지 않았던가. 게다가 3만원에 일본 황족 아들과 결혼시키라느니, 일본 후작과 혼담을 넣겠다느니 하는 해괴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심지어는 누구인지 모를 남자가 연애 편지까지 보내기도 했다. 

 

젊고 여린 여성이 가문은 물론 대한제국 황실의 명예까지도 생각하느라 평생 수절의 길을 택한 것이다.

상하이에서 우사 김규식 박사가 민갑완을 찾아와 독립운동을 권유했다.

 

“민 소저(아가씨), 소저의 원수는 저희가 갚아드리겠습니다. 소저는 용기를 내어 독립운동을 해봅시다. 제 아무리 일국의 천황이고 황태자라도 민족을 잊은 행동을 한 자는 죽어 마땅합니다.”

 

민갑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10여 년 동안 국모(國母)의 자격으로 신부수업을 받았던 당대 조선의 전형적인 여인이었던 것이다.

 

“아닙니다. 누구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남을 해치면서까지 팔자에 없는 행운을 찾고 싶지 않습니다.”

 

...

그는 한 언론과의 한 인터뷰에서 왜 결혼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한국 여성의 지조가 얼마나 강한지를 일본인들에게 보여줌으로서 우리의 비운을 복수하려고 한 겁니다”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1945년 해방이 됐지만 민갑완은 귀국할 생각이 없었다.

 

그 땅을 디딘다면 슬프고 가슴 아팠던 과거가 더욱 생생하게 되살아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동생의 간청과 김구·이시영 선생의 권유로 귀국을 단행한다.(1946년)

 

 하지만 귀국한 그녀를 돌볼 형편이 되는 일가 친척들은 없었다. 여관을 전전하고 친척집에서 동가숙서가식 했다. 마흔대 후반의 나이였다. 젊고 아름다운 모습은 오간데 없고 그녀를 반겨줄 사람도, 수중에는 아무런 재물도 없었다.

영친왕은 5·16이후 1963년에 귀국이 허용되었다. 주위에서는 조국으로 돌아온 영친왕과의 만남을 주선했으니 민갑완은 거부했다.

 

양가의 규수로 태어나 평생 수절했던 한 여인이 감내하기엔 세상인심이 너무도 각박했던 것이다.

 

고혈압과 기관지염, 심장병 등 갖가지 지병에도 생활고 때문에 약값도 제대로 대지 못했다는 아픈 사연도 전해진다. 만년에는 후두암까지 겹쳐 고생하다가 1968년 만 70살의 나이로 한많은 세상을 떠난다.

 

평생 의지하였던 남동생이 죽자 곡기를 끊어 삶을 마감한 것이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정혼녀였던 그녀는 유언으로 ‘나는 처녀인 만큼 절대 남의 집에서 죽게 하지 말고 수의는 옛날 선비처럼 남복을 입혀 주세요’ 라고 했다. 황실의 권위와 가문의 영예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바람이었을 것이다. 이후 부산 천주교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녀는 또 죽는 그 날까지 영친왕과 이방자(마사코)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았다.

 

“하늘을 두고 맹세해도 난 두렵지 않을 정도로 그 분(영친왕)을 저주하거나 미워한 적이 없었다. 운명은 어디까지나 국운과 정략이 깃들어있기 때문에….”

 

민갑완 규수는 이방자 여사의 처지도 이해했단다.

 

“방자 여사도 불행했으리라 생각한다.… 원수처럼 첩첩이 쌓인 양국 간 감정의 틈바구니 속에 끼여 있는 심정 얼마나 괴로울까 생각하면 인간적인 면에서 동정도 간다.”

 

이방자 여사 역시 민갑완 규수의 처지를 이해했다. 그 역시 정략결혼의 희생양이었으니까….

“(조)선·일(본) 융화의 대역이라니…. 불안과 두려움 속에…아무도 모르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죽어버렸으면 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초상집 같은 슬픔과 우울에 쌓여있을 집안을 생각하면….”(이방자의 <나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 이 마사코입니다>)

 

이방자 여사는 생전에 민갑완 규수를 꼭 한 번 만나고 싶다고 회고했다.

 

“나는 민규수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그 분의 슬픈 운명이 마치 내 죄인 듯하고 언젠가 기회가 오면 꼭 민규수를 만나 손을 잡고 위로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민갑완의 존재도 기억해야 할 우리의 역사다. 그녀의 자전적 이야기가 <백년한>이란 책으로 전해온다. 가슴에 응어리진 슬픔을 헤아리려면 백년이 아니라 천년도 모자랄 것이다. 몇십년만 먼저 태어났으면 어쩌면 조선의 국모가 되어 만백성의 숭모의 대상이 되었을 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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