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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청춘스타 변영훈 비화,영화 촬영 중 헬기 추락!삶의 마지막 순간 사이의 고통스러운 이혼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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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jun1989 2021. 3. 18.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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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인 외모와 우수에 찬 눈빛이 영웅본색의 장국영을 연상케 했던 배우 변영훈. 1993년 영화 촬영 중 헬기 추락으로 뇌사상태에 빠졌다가 끝내 숨을 거둔 비운의 배우 변영훈에 대해 알아보겠다. 변영훈이 고인이 된지도 23년이나 지났고 배우로서 한창 뜨고 있던 와중에 요절해서 현재로썬 배우 변영훈에 대해 알려진 사실이 별로 없다.

변영훈은 어딘가 우수에 차있고 진지하면서 이지적이며 우울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배우였다. 초창기 그가 맡았던 배역들도 대부분 우울하고 어두운 정서를 가진 지식인층 역할이 많았는데 [검은 양복]역시 어머니의 안락사 문제로 고민하는 자식으로 나와 특유의 우울한 이미지를 배역에 성공적으로 밀착시켰다.

 

또 하나의 스타탄생을 예감하듯, 그는 시대극에서 시트콤까지, 드라마와 영화 출연에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출발하지도 않은 그의 질주를 시샘하듯, 영화 ‘남자 위의 여자’를 찍다가 헬기 사고로 운명을 달리했다. 그리고 그 불똥은 KBS로 튀었다.

한강 선상 결혼식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변영훈은 이날 오후 3시 50분경 헬기에 탑승했다가 이륙 10분만에 기체가 심하게 흔들리면서 수심 밑으로 추락. 촬영 현장을 취재하기 위해 같이 탑승했던 KBS연예가중계 PD김일환만이 침몰중이던 헬기의 창문을 깨고 탈출하여 극적으로 생존. 나머지 7명은 사망. 기장,영화 촬영감독,KBS카메라맨,SKS직원,촬영보조맨은 현장에서 즉사하고 동승객이었던 미도영화사 사장 이상언은 구조되어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헬기 추락 후 4시간만에 사망. 

 

변영훈은 사고 후 약 35분만에 구조되어 1시간의 심폐소생술로 맥박은 돌아왔지만 구조됐을 당시 이미 심장과 폐의 기능이 정지한 상태였다. 당시 의료진은 변영훈의 회복 가능성에 대해 기적을 바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소견을 밝혔다. 변영훈은 구조 후 인근 방지거 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고 이후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졌지만 8월 28일 낮 12시 40분경 맥박과 호흡이 급격하게 나빠지면서 뇌사상태 75일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사고는 정원을 초과한 인원이 헬기에 탑승한 것이 원인이었으며, 당시 필수 탑승 요원인 부기장이 탑승하지도 않았다. 또한 수상 비행 최저 고도를 무시한 것이 화근이 됐다. 장래가 촉망받는 한 연기자가 연기의 꽃도 채 피우지 못한 채 팬들의 곁을 떠난 사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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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사생활은 순탄치가 못했다. 연기자로서 경력이 풀릴 무렵부터 가정사가 삐그덕거렸다.

 

[분노의 왕국]으로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한지 1년 밖에 안 된 부인이 이혼소송을 청구했고 변영훈도 맞고소를 했다. 두 사람 사이에선 아이도 있었다. 부인이 변영훈의 연예 활동에 불만을 가진다는 소문이 연예가에 퍼졌고 이혼소송은 변영훈이 뇌사상태에 빠져 있을 때도 진행됐다. [분노의 왕국]에서 김희애와 선보였던 온천 혼욕 장면이나 럭키자연퐁 광고가 나왔을 때도 집에서 난리가 났었다고 한다. 그래서 김희애와 스캔들이 나기도 했다. 헬기 사고 당일 날에도 이혼 소송 중이었던 부인이 촬영장에 찾아와 변영훈을 난감하게 만들었고 그 자리를 피하기 위해 변영훈은 결국 타지 않아도 되는 헬기에 탑승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사고 당하기 약 두달 전엔 음주운전 사고까지 얽혀 당시 변영훈의 개인사는 이래저래 꼬여있었다. 변영훈이 [분노의 왕국]으로 스타덤에 오르고 사고가 나기까지 1년여동안 그렇게 다작을 했던것은 혹시 복잡해진 개인사를 일에 열중하면서 잊고 싶어서는 아니었을까? 

 인천 태생인 변영훈은 결혼 후 부평에서 살림을 차렸지만 음주운전 사고가 났을 때는 집 주소가 인천으로 돼있었고 차량 역시 인천시로 등록돼 있었다. 그때 이미 부인과는 별거중이었던것으로 보인다. 이종사촌이 쓴 글이 맞다면 아이가 태어나고 떨어져 살았던것같다. 굳이 이종사촌의 글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미 1992년 연말에 부인이 수원가정법원에 이혼소송을 청구했고 그 다음 달에 맞고소한 변영훈의 이혼청구소송의 결과는 뇌사상태에 있을 때 인천지법에 의해 판결이 났다. 이것만 봐도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별거에 들어갔던것으로 보인다. 변영훈은 뇌사상태에서 이혼남이 됐지만 이후 아내가 항소를 했기 때문에 확실하게 이혼이 처리된건지는 모르겠다. 변영훈 사후에 아내가 유가족 입장에서 헬기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걸었기 때문에 서류상으로는 미망인으로 남았을 수도 있다.

 

변영훈의 사후 변영훈의 아내를 비롯한 유족 4명이 헬기 회사를 상대로 9억 9천만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걸었던건 유족 입장에서 생각해 봤을 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미도영화사가 따로 보험에 가입하지 않았고 영화사 대표마저 숨을 거둔 바람에 변영훈 측은 금전적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변영훈 가족들에게도 가슴 아픈 결과였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태어난지 1년도 안 된 자식을 두고 숨을 거두었으니 유족들의 삶도 생각해야 한다. 

 변영훈은 헬기 사고로 사망한 비운의 배우로 기억되고 있다. 배우가 가진 우울한 느낌과 순탄하지 못했던 사생활까지 더해져 비극적인 느낌이 더욱 커졌는데 이마저도 세월이 흐르니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가고 있다. 그리고 다른 고인이 된 연예인들도 마찬가지지만 사고 시점에 대한 기억이 제 각각이다. 변영훈이 헬기 사고 직후 즉사한걸로 아는 사람들도 많다. 

 

변영훈이 가진 특유의 우수에 찬듯한 분위기와 우울한 느낌이 좋았고 [분노의 왕국]에서 선보인 열연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것이다. 지금은 [울밑에 선 봉선화]나 [세상은 내게]에 대한 단편적인 기억들만 가지고 있는데 그가 생전에 출연한 영상 자료를 조악한 화질과 음질로라도 좋으니 접하고 싶을 따름이다. 너무 이른 나이에 요절해서 다른 요절한 배우들과 마찬가지로 죽고 난 뒤에 더 그리운 배우로 남았다.

 비극적인 사고로 한창 활발히 연기 활동을 펼치다가 고인이 되고 말았지만 연기자로서의 경력은 순탄하게 흐른 편이었다. 공채탤런트 연수기간을 거쳐 조연에서 주연으로 자리 잡은 기간이 2년이 채 되지 않았다. 사실상 무명시절이 거의 없었다고 보면 된다. 공채탤런트로서 kbs전속기간이 끝나고 바로 mbc에서 주연을 맡아 출연한 작품이 [분노의 왕국]이었고 그 작품으로 스타가 됐다. 이후 사고가 나기까지 1년 동안은 다작을 하며 왕성하게 활동했다. [분노의 왕국]으로 얻은 인기 덕에 김희애와 세제 광고도 찍었고 드물게 이지적이고 귀족적인 용모가 호감을 사 대중들에게도 인기가 좋았다. 대외적으로 이름을 알렸을 때는 이미 서른을 넘겼고 유부남이긴 했지만 외모에서 풍기는 매력으로 업계 관계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짦은 연예계 활동이었지만 연예인으로서는 성공적인 경력을 쌓고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1993년 있었던 탤런트 변영훈씨 사건이 떠오른다. 훈훈한 꽃남이었고, 나름의 연기력으로 방송사 신인상을 수상하며 활발한 활동의 닻을 올렸던 그.

 

 당시 뇌사상태에 빠졌고 회복 기미도 보이지 않았던 변영훈에 대한 동정과 쾌유를 바라는 사람들의 바람 때문에 출연중이던 작품들에서 그가 맡았던 배역들은 제작진이 최대한 타협한 결과를 보여주는것이었다. [우리식구 열다섯]은 해외출장, [세상은 내게]에선 해외로 도피했다가 일을 잘 해결짓고 다시 여주인공과 결합하는걸로 처리됐으며 [청춘극장]에서도 대타 배우를 섭외해 배역의 일관성을 유지시켰다. 방송사에선 병상에 누워 있던 변영훈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갖춘것이다. 

변영훈은 국내의 무신경한 자료 보관 환경 때문에 1990년대 초에 활발히 활동을 했던 주연급 배우였음에도 현재 남아 있는 자료가 턱없이 부족하고 가장 기본적인 생년 기록조차 잘못 표기되어 있다. 그래서 아쉬운 마음에 변영훈의 작품 경력과 그에 대해 알려진 사실을 정리해 보았다.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변영훈에 대한 희미한 기억과 구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긁어 모은 자료를 가지고 정리를 한건데 자료가 너무 부족해서 고생스러웠다. 그러나 변영훈이 이렇게까지 잊혀진다는것이 무척 안타까워 그에 대한 자료 정리의 필요성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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