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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가수 이난영! 목포의 눈물이라는 자신의 노래말처럼 매우 설움이 많은 생을 살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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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jun1989 2021. 3. 18.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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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가수 이난영은 어느 남자하고도 완전한 사랑을 이루지 못한 불행하고 사연이 많은 여인이었다.

이난영은 한 시대를 풍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가수로 대성공을 한 분이지만, 한 인간으로서, 한 여인으로서의 이난영 삶은 그리 순탄치 못했습니다. 유명세에 비해서, 삶의 모습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오늘은 그의 가수로의 성장과정과 삶의 모습을 중심으로 소개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목포의 눈물이라는 자신의 노래말처럼 매우 설움이 많은 생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귀에 감기듯 애절한 콧소리로 민족의 울분을 노래했던 ‘목포의 눈물’의 주인공은 고(故) 이난영. 그녀의 노래는 일제 치하에서 고통받는 민족의 슬픔과 울분을 대변하는 한의 가락이었다. 그래서 대중가수로는 드물게 민족가수로까지 추앙을 받았다.

그녀는 또 작곡가인 남편 김해송과 함께 한국 최초의 뮤지컬 악단 ‘KPK악단’을 창립, 우리 땅에 새로운 음악을 수혈한 개척자였다. 해외에서 명성을 날렸던 최초의 보컬 그룹 ‘김씨스터즈’와 ‘김보이스’를 키워낸 억척스런 어머니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성으로서 이난영은 불행했다. 남편은 납북돼 생이별을 했고 홀로 남은 자신을 보살펴준 가수 남인수는 병으로 떠나보냈다. 비련의 여인으로 세상의 주목을 받다가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은 그래서 더욱 잊을 수 없는 ‘트로트 명곡’으로 불려진다.

이난영(본명 이옥례)은 1916년 전남 목포 육전거리의 허름한 초가집에서 1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은 일자무식에 소문난 술주정꾼. 농사철이면 품앗이로 연명해야 하는 가난한 집이었다.

 

그래도 예술적인 ‘끼’와 ‘능력’은 타고 났는지 두 살 위인 오빠 봉룡은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명한 작곡가로 컸다. 그는 보통학교를 거쳐 2년제 심상고등과를 마친 뒤 목화공장의 직공으로 가계를 도왔고 이난영은 목포 공립보통학교를 4년 다닌 게 학력의 전부다.

 

어려서부터 노래 잘 부르는 꼬마 가수로 소문났던 그녀는 유성기 소리를 듣기 위해 일본인 집에 보모를 자청해 들어갔다. 매일 유성기 노래를 따라 부르는 그녀의 노래 재질을 알아본 일본인 주인은 순회 극단의 공연무대에 막간 출연을 주선해 주었다.

16살이 되던 1932년 어느 날, ‘태양극단’의 목포 공연 때 처음으로 무대에 섰다. 정식 가수는 아니고 막간 가수였다. 박승희 단장은 그녀의 노래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 자리에서 극단의 일원이 되었다. 박 단장은 ‘이름이 촌스럽다’며 난영이란 예명을 지어 주었다. 태양극단의 막내로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며 8개월 간 전국을 돌던 중 일본 오사카로 공연을 떠났는데, 갑자기 일본에서 극단이 해산돼 버렸다.

갈 곳 없는 이난영은 변두리 극장 분장실에 기숙해야 했다. 돌아갈 차비도 없어 떠돌이 신세로 전락했다. 그때 구세주가 된 사람은 오케이 레코드 사장 이철씨. 일본의 조선 레코드 특약점 주인이 이난영이라는 가수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자 귀가 번쩍 뜨인 이철은 수소문 끝에 떠돌고 있던 그녀를 찾아냈다. 직접 노래실력을 테스트한 후 1933년 오케이 레코드의 전속 가수로 그녀를 스카웃했다.

 

데뷔 SP 음반은 1933년 10월 발표된 ‘향수’다. 그녀의 노래가 처음 수록된 음반은 그 해 8월 태평레코드에서 발매한 창극 춘향전전집 SP음반(총 5장)이다. 여기에는 그녀의 첫 육성노래 ‘시들은 청춘’이 담겨 있다.

33년 11월 발표한 ‘불사조’는 이난영의 첫 히트곡. ‘불사조’에 이어 이듬해 2월 발표한 ‘봄맞이’가 또 다시 사랑을 받으면서 그녀는 단숨에 촉망 받는 신인가수로 떠올랐다. 그 해 가을 도쿄에서 열린 전국 명가수 음악대회에 한국인 가수로는 혼자 출전했는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34년 조선일보에서 전국 6대 도시의 ‘애향가’가사 모집을 했다. 3,000여 편의 응모작품 중 목포 출신 문일석이 응모한 ‘목포의 눈물’이 당선작으로 뽑혔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뀐 ‘목포의 눈물’은 35년 이난영을 ‘가요계의 샛별’로 만들었다.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수 만장이 날개 돋힌 듯 팔렸다고 한다. 지금에야 100만장 판매를 우습게 이야기 하지만 유성기 시대에 수 만장은 대박 중의 대박이었다.

 

‘목포의 눈물’은 대 히트와 함께 목포 사람들의 자존심으로 자리를 잡았고 한 민족에게는 설움을 달래주는 민족 가요로 널리 불렸다. 이 인기를 바탕으로 이난영은 36년 ‘오카란코’란 일본 예명으로 일본 가요계에 진출해 데이지쿠 레코드에서 ‘이별의 뱃노래’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 노래는 ‘목포의 눈물’ 일본어 버전이다.

그리고 1937년에 김해송과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립니다.

 

남편인 김해송은 가수이자 작곡자였고, 지금의 뮤지컬의 개념을 국내에 처음 시도한 인물입니다. 당시에는 천재라는 평가를 받던 사람입니다. 오케이레코드 이철 사장과 친분으로 이난영을 알게 되었고, 약 2년 정도 열애 끝에 1937년에 결혼을 했습니다. 39년에는 남편 김해송이 작곡한 '다방의 푸른 꿈'이라는 곡을 이난영이 불러서 큰 인기를 얻었는데, 이 곡이 국내 최초 블루스 곡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이난영은 1940년대부터는 단순히 노래하는 싱어로서 뿐만 아니라 극단에서 연기와 노래를 함께 하는 탤런트로서의 재능를 발휘하기도 하는데, 이는 뮤지컬을 중요시했던 남편 김해송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오빠인 이봉룡도 김해송에게 악기 연주와 화성법을 배워서 본인도 작곡자로 성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김해송은 뮤지컬을 시도하기 위해 'KPK극단'을 만들고 활발한 활동을 했는데, 6.25가 발발하면서 납북되어 버렸습니다. 그런 이유로 김해송은 분단 후 남한에서 그 이름이 거론되는 것이 어려워 졌습니다. 그 이후 국내에서 타 작곡자의 이름으로 발표된 곡들 가운데는 실제 작곡작가 김해송인 경우도 많을 것이라는 것이 가요계에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이난영은 데뷔 6년째 어느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조선의 예술가(연예인)들은 걸핏하면 결혼했다가 이별을 맞이하는데, 자신은 가정을 소중하게 여기게 때문에 이별 같은 것은 절대 하지 않겠다는 말을 했는데, 결국 6.25라는 민족동란이 이난영의 가족을 이별하게 만들었고, 이후 가족관계에서 만큼은 매우 불후한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납니다.

이난영과 김해송은 슬하에 7남매를 두었는데 미국으로 건너가 김시스터스와 김보이스라는 이름으로 성공을 거둡니다. 지금도 후손들이 LA에서 살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난영의 후손들이 한국에 살지 않고 일찍부터 고국을 떠난 것이 이난영 사후 기념관 건립이나 각종 추모사업이 진척되지 않는 주요 원인 중에 하나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난영이 살아있을 때 자식들과 초청을 받아서 미국에 가서 한 1년 정도 생활을 하다가 적응을 하지 못하고, 다시 고국을 돌아왔습니다.

인생의 허무함에 몸서리쳤던 이난영의 유일한 친구는 술이었다. 1965년9월 11일 새벽 이난영은 알코올 중독으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한 많은생을 살아온 이난영은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이난영이 자살을 했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최후의 모습이 매우 불행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사망 소식에 김씨스터즈 세 자매는 망연자실했지만 빡빡한 스케줄 때문에 장례식에도 참석 못하는 불효의 한을 남겼다

 

 

이난영은 다른 연예인과도 염문을 뿌렸는데, 남편을 잃고 외로워하던 이난영에게 힘이 되어준 사람이 당대 최고의 남자 가수인 남인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사연이 많습니다. 원래 남편인 김해송에게 여자가 생겼었는데, 후배 연예인인 '김은하'라는 여자였습니다. 반대로 이난영이 남편을 잃고 나중에 남인수와 가깝게 지냈는데, 남인수의 원래 부인이 바로 자신 남편의 여자였던 '김은하'라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 악연을 갖게 되었는데, 남인수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는 이난영을 멀리하고 원 부인인 김은하라는 여인을 다시 찾았다고 합니다. 두 집안의 악연은 자녀들에 의해서 끊겼는데, 자녀들이 결혼을 해서 미국으로 건너가 살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난영이 원수처럼 생각하던 여자를 자신의 아들이 장모로 모시고 살게 된 셈이었습니다. 이난영은 어느 남자하고도 완전한 사랑을 이루지 못한 불행하고 사연이 많은 여인이었다는 생각입니다. 목포의 눈물이라는 자신의 노래말처럼 매우 설움이 많은 생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이난영은 개인적으로 불행한 삶을 살았지만, 노래를 통해 온 국민을 위로하고, 목포라는 도시를 전국민에게 알리는 그 공을 세웠습니다. 요즘 지자체에서 역사적 인물들을 활용하여 자기 고장 알리기에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알고 기억한다는 것은 지자체 발전에 굉장히 유리한 조건입니다. 심지어 북한 동포들도 이난영과 목포의 눈물이라는 노래를 알고 있을 정도니까, 과거의 흘러간 인물로 간주할 것이 아니라 아직도 존재하는 이난영의 문화적 상징성에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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