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나 판토마임 배우 중에서 한 사람을 꼽으라면 올드 팬들이 잊지 못하고 기억해 낼 한 사람은 아마도 미국 할리우드 무성영화 시절 최고의 코미디 스타 찰리 채플린일 것이다.
통렬한 사회비판과 슬픔의 정서가 가득 배어 있는 우스광스런 그의 코미디는 사실 마임극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토마임 기술을 익힌 채플린은 헐렁한 바지에 지팡이를 휘두르는 독특한 부랑자 인물을 연기에 전 세계 관객들로부터 열렬한 사랑을 받았던 인물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그와 비견되는 배우로 첫손에 꼽으라면 단연 추송웅이 아닐까? 그가 연기한<빨간 피터의 고백> 그 하나만으로도 찰리 채플린과 동열에 서기에 손색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추송웅은 누구인가? 50∼60대에 속한 사람들은 그를 단박에 기억을 해낼 것이나 그가 고성 출신의 불세출의 연극배우였음에도 젊은 세대는 쉽게 그가 누구인지를 떠 올리지 못한다. 추송웅이 작고한 뒤 시인 장석주가 남길 글을 읽어 보면 그의 위대성을 알게 된다.
추송웅이 1985년 12월 29일 급성신부전증 등 복합증세가 겹쳐 4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1941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난 추송웅은 친구들에게 `사팔뜨기`라 따돌림을 받으며 상처 투성이로 성장기를 보냈다.
두꺼운 장막속에 자신을 감추려는 의도에서 시작했다는 그의 연극은 상처와 콤플렉스로 신음하던 추송웅을 세상속으로 드러냈다. 중앙대 연영과에 입학한 그는 교실에서 커튼을 뜯어 덮고 자면서 악전고투, 경상도 사투리와 사시라는 콤플렉스를 극복했다.
1959년 말론 브랜도와 같은 배우가 되기 위해 추송웅은 중앙대학교 문리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입학 동기 중에 박근형, 최정훈, 맹만재 등이 끼어 있었다. 1m 65의 왜소한 키, 불록 튀어나온 배, 구부정한 어깨, 사시, “저렇게 못생기기도 어렵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그로케스크한 얼굴, 거기에다 지독한 경상도 사투리... 어느 하나 배우의 조건에 맞는 것이 없는 그였다. 그는 입학동기들을 보고 단번에 주눅이 들었다.
추송웅은 연기에의 집념과 노력으로 타고난 신체적 결함을 극복하고 극단 ‘민중’과 극단 ‘자유’ 등에서 배우로 활동하며 어느덧 중견배우로 성장한다. 1971년 제7회 동아연극 최우수 남자연기상을 수상하고 한 해 걸러 또다시 최우수 남자연기상을 수상한다. 그러나 연극배우 10년 동안 52편의 연극출연료 수입금 총액이 10만 8천 6백원. 연출가인 최치림은 그의 딱한 사정을 알고 여러 차례 쌀을 사들고 그의 집을 방문했다. 동료 배우와 결혼해 이미 세 아이까지 두었지만 그의 생활은 비참했다.
“배우란 전생에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들만의 불행한 직업이야. 그래서 배우는 가난과 싸우며 철저히 헐벗고 굶주릴줄 알아야 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이며 배우생활 10년 동안 동가식 서가숙의 고된 생활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는 배우를 천형의 업이라고 생각했다.
추송웅의 신화를 만든 `빠알간 피터의 고백`은 그의 표현대로 `원숭이를 몸 속에 넣는 동화작업`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탄생했다. 창경원 허락을 받아 원숭이 우리 안으로 들어가기도 하는 우여곡절 끝에 추송웅은 원숭이와 사람을 구분할 수 없는 `피터`로 변신했다.
그는 6개월 동안 창경원의 원숭이 우리 앞에서 원숭이의 몸짓과 습성들을 관찰하고, 나중에 창경원 측의 허락을 받고 원숭이 우리 안에 직접 들어가기도 했다. 개막을 앞두고는 아예 극장에 이부자리를 갖다두고 먹고 자며 연습에 몰두한다. 얼마나 이 모노드라마에 빠져 있었던지 나중에는 “실제 원숭이가 꾸물꾸물 기어나와 내 자신도 주체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연극으로 `한국 현대사에 신화 탄생`이라는 격찬을 받았다. 아내의 곗돈 75만원을 쏟아부어 만든 `빠알간 피터`는 1년간 163회나 공연해 8만5천명을 끌어들였다. `빠알간 피터의 고백`으로 482회 15만2천명, 1인 6역을 맡은 `우리들의 광대`에 512회 23만5천명을 모아 `1000회 모노드라마 출연, 40만명의 관객 동원`이라는 전무후무한 모노드라마 출연기록을 세운 추송웅은 결국 자신의 삶의 에너지를 무대 위에서 모두 탕진함으로써 죽음을 재촉했다.
1977년 9월 9일자 조선일보는 ‘한국연극사에 신화 탄생. 추송웅 선풍’이라는 제목으로 이 기적을 기사화한다. 마지막 날 공연 추송웅은 링게르를 맞아가면서 1일 4회 공연을 강행한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쓰러진 추송웅은 “세상이 노랗게만 보인다...”며 일어나지 못해 결국 약속했던 5회공연은 취소된다.
이 연극의 성공으로 추송웅은 적지 않은 돈을 벌어들인다. 결혼 후 15년 동안 합정동, 청전동, 서교동, 상수동을 전전하던 셋방살이를 면하고 여의도에 아파트를 구입해 이사한다.
그 이후 추송웅의 연극은 거의 모두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다. 이듬해 10월 26일 명동 코리아 극장에서 공연된 <우리집 식구는 아무도 못말려>에서는 2회 공연 수입금 1백만 원을 받는다. 이른바 극장이나 극단에서 예술적 업적이나 대중적인 인기가 높은 연극배우나 희곡작가에게 하루 공연 수입급 전액을 지급하는 시혜 공연Benefit Performance의 첫 번째 수혜자가 된 것이다. 한편으로 추송웅은 ‘상업주의 연극의 원흉’, ‘관객의 거짓 욕망에 야합하는 배우’라는 호된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가 <빨간 피터의 고백>을 공연하는 동안 무대에서 먹은 바나나가 7백개, 포도가 5백근, 관객이 땀 딱으라고 던져준 손수건이 3백여 장이나 된다.
1985년 12월 29일 새벽 4시. <빨간 피터의 고백>지방순회공연을 끝내고 12월 9일까지 신촌의 한 극장에서 <우리들의 광대>에 출연했던 추송웅은 복통으로 경희대 부속병원에 입원한다. 그리고 그는 깨어나지 못한 채 이날 오후 3시에 영원히 눈을 감는다.
한국 연극사에 독보적인 발자국을 남기고 떠난 추송웅에 대해 그를 낳아 기른 그의 고향에서는 마치 산마루에 구름이 걸렸다가 사라진 것처럼 그런 사람이 있었는가 싶을 정도로 추송웅에 대해서 무감각하고 무신경이다.
배우 겸 영화감독 추상미가 아버지 추송웅이 죽었을 때 상실감이 컸다고 말했다. 23일 오전 방송된 KBS 1TV 아침마당에서 추상미는 아버지인 연극 아침마당 추상미 14세 때 父 추송웅 죽음, 상실감 컸다
추상미는 영화를 연출하며 아버지인 故추송웅이 생각났다고 했는데 그녀의 아버지 故추송웅 역시 배우였습니다.
이분은 정말 아까운 인재입니다 너무 일찍 우리곁을 떠나셨습니다.추송웅님에 연기는 수준이 틀립니다. 모노드라마를 연기하셨을때 목소리, 음성,억양,Gesture,어깨움직임, 유머,재치이 모든 예술적 기질이 하늘로 부터 부여받은 천부적인 소질 Charisma 연극배우였습니다. 관객이 연극공연을 보는 동안 지루하지 않았거든요.그동안 좋은 연극을 보여주셔서 고마웠습니다. 많아 보고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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