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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백호 김자옥 이혼 이유? 최백호 아픈 과거 회상! 꼬리가 길면 잡힌다! 딸의 불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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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jun1989 2021. 8. 7.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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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백호가 가정사를 고백해 관심을 받고 있다.

 

3년 전인 2014년 11월 16일 김자옥은 폐암에 따른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김자옥은 오승근과 결혼 전 가수 최백호가 이혼을 한 경험이 있다.

 

1980년 김자옥 최백호의 결혼 소식이 들리게 되는데 얼마지나지 않은 3년 만에 이혼하게 됩니다. 

 

 

 

70년대 톱탤런트로 활발하게 활동했던 김자옥이었지만, 1980년 돌연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바로 가수 최백호와 결혼을 하면서 평범한 가정주부가 되기로 했기 때문이었는데요.

 

 

 결혼 후 평범한 주부로서 화면에서 모습을 감춘 김자옥이지만 1년 6개월 만에 드라마 ‘사랑의 조건’에 출연하게 됩니다. 한 남자의 여자로만 살기에는 배우로서 연기에 대한 갈망이 컸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실제 그녀는 당시 인터뷰를 통해 결혼 후에도 꺾이지 않았던 연기에 대한 갈망을 고백했었고, 결국 최백호의 허락 하에 드라마에 출연하게 되죠. 단 한 편만 출연하려고 했던 그녀이지만 그 한 번은 연기에 대한 갈증을 더욱 키우게 됐고 이후 같은 년도에 드라마 ‘아내’에 한 번 더 출연하게 됩니다.

 

 

 

 연기 복귀 후 그 다음해 김자옥 전남편 최백호와 헤어지고 각자의 길을 걷게 되는데 이것이 결정적인 최백호 김자옥 이혼이유로 보입니다. 이후 지금의 남편 가수 오승근과 만나 재혼한 건 그로부터 1년 뒤의 일입니다.

 

 

 

가수 최백호와 배우 고 김자옥은 부부 사이였습니다.최백호 나이 현재 70살이며 김자옥이 살아 있었다면 69세의 나이 입니다. 두사람은 1980년에 결혼을 하여 1983년에 이혼을 하게 됩니다. 두사람에게는 자식이 없습니다.



 

헤어진 이유는 별다른 이유가 없고 그냥 성격이 너무 안맞아서 헤어진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근데 참 특이한 점은 이혼 하자 마자 1년 지나서 서로 각자의 배우자를 만나게 되어 결혼을 하고 잘삽니다.

 

 

 

성격이 서로 안맞았던 이유를 추측 해보면 최백호는 그때 당시에 그리 인기가 많지 않았던 신인 가수였고 벌이도 변변 찮았습니다. 대신 김자옥은 인기가 많아서 수입도 많았었죠.

 

 

 

김자옥은 집안도 엄청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최백호와는 사는 품격에 차이가 있었던것 같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이 맞추며 살려니 너무 안맞았던것 같습니다.

 

 

 

정말 어른들 하는 말처럼 집안이 비슷한 사람끼리 결혼을 해야 잘산다는말이 점점 피부로 느껴집니다. 살아온 환경은 정말 무시 못하겠더군요



사실 김자옥은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여배우중의 한명이었고, 아버지 김상화가 시인겸 우성 영화사 전무로 있었습니다. 집안의 재산 역시 꽤 풍족했죠.

 

 



사실 최백호 집안이 정치인 집안(아버지가 국회의원)이라고는 하지만, 벌써 옛날에 사망했고, 최백호의 경우는 인기를 좀 얻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앞날이 불안한 신인급 가수(?)중의 한명이었습니다. 

 

당시 28살의 나이로 당선된 시대의 풍운아였죠(최백호 아버지 직업).

 

 

 

하지만 6.25 전쟁 당시 교통사고(터키군의 수송차량과 충돌)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당시 최백호가 태어난지 겨우 5개월된 때였죠.

 

 

 

최백호: "할아버지가 아주 부농이었어요. 그런데 저를 굉장히 싫어했죠. 제가 태어나자마자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이었지요. 흔히 하는 말로 "애비 잡아먹은 자식"이라고 생각하셨던 겁니다. 때문에 할아버지는 저에 대한 노여움이 아주 많았죠. 하다못해 학비 한번 안 대주셨어요. 이건 개인적인 가정사지만 지금도 삼촌들과 왕래를 안하고 있어요."

 

 

 

이렇게 최백호는 친가와 연을 끊고 지냅니다.

 

따라서 최백호 가족(어머니와 누나 2명)들은 생활고에 시달리게 됩니다.

 

 

 

최백호: "어머니는 시골 초등학교 선생님이었어요. 때문에 전근을 많이 다녀야 했던 어머니를 따라 저 역시 어릴 적부터 이곳저곳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죠. 결국 어머니께서는 당시 교사가 받던 박봉으로는 도저히 자녀들을 교육시킬 수 없다며 부산에서 장사를 시작했어요."

 

 

 

최백호: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인지 몰라도 조금은 조숙했던 것 같아요. 아버지에 대한 정도 모자랐고 어릴적부터 혼자 있을 때가 많아 어쩌면 상당히 빗나갈 만한 여건이었는데…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너무나 많이 들어왔는데 그게 저에겐 거의 신화처럼 다가왔어요. 때문에 제 머리맡엔 항상 아버님 사진이 있었어요. 돌아가셨지만 늘 뒤에서 든든하게 받쳐준 버팀목이 되셨거든요. 아마 그런 아버님 때문에 빗나가지 않았던 것 같아요."

 

 

 

가난과 아버지의 부재는 최백호를 일찍 철이 들게 만듭니다.

 

최백호: "내 노래중에서 2, 3곡을 빼놓고는 다 내가 직접 작사 작곡한 곡들이다. 잦은 전학과 아버지의 부재에서 오는 외로움을 달래려 초등학교 시절부터 나무 위에 올라가 습작하던 습관이 내가 스스로 노래를 만들게 하는 데 밑거름이 된 것 같다."

 

최백호가 재수를 하던 해 10월 어머니가 갑자기 사망하게 됩니다(1970년 10월).

 

 

 

최백호: "어머니가 가게를 열어 적은 돈이나마 벌어 볼 희망에 부푼 것도 잠시, 어머니께서 췌장암 판정을 받았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세 들어 살던 가게는 이내 처분했죠."




결국 최백호는 군대에 입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입대 반년만에 그는 결핵을 앓게 됩니다(1971년 1월 입대, 12월 제대).

 

 

 

최백호: "마산국군통합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거기는평생 있고 싶은 곳이었어요. 하지만 결핵 환자 보상금 11만5000원을 주고는 나가라고 하더군요. 당시 학업과 직장 때문에 흩어져 살고 있던 누나 둘에게 의지할 수가 없었어요."(최백호 의가사 제대)

 

 

 

사실 일제시대때는 결핵에 걸렸다는 것은 곧 사망선고나 다름없는 중병이었습니다.

 

이후 차츰 치료율이 상승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결핵의 치료법은 잘 먹고 푹 쉬어야 하는 '부자병'이었죠.

 

최백호가 앞이 캄캄했을 것 같네요.

 

 



결국 최백호는 경남 동래군의 일광해수욕장 인근의 가장 싼 방을 구해 혼자 요양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월세를 낼 돈이 떨어지자 산속에 들어가서 오두막을 지어서 기거하게 되죠.




최백호: "당시 중고 기타하나 들고 산속으로 들어갔어요. 2년간 이어진 지독하게도 힘들었던 시간은 어쩌면 내가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고,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들을 습작하는 데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해준 기회였는지도 몰라요."

 

 



이때 최백호의 예술성이 크게 함양되었을 것 같네요.

 

아마 최백호의 노래에 쓸쓸함과 고독이 짙게 묻어나오는 것은 이런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약 2년간의 요양을 통하여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된 최백호는 친구 매형의 부산 클럽에서 노래를 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1973년 12월).

 

이때 최백호는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와 짙은 음색으로 큰 인기를 얻게 되고, 서울로 진출하게 됩니다(1974년 당시 대형 음반사였던 서라벌레코드사의 소속 가수가 됨).

 

 



결국 이렇게 최백호는 '먹기'위하여 통기타 가수가 됩니다.

 

그리고 1977년 그의 데뷔곡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를 발표하죠.

 

 



최백호: "사실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면서 쓴 가사예요. 전쟁이 나던 해에 내가 태어난지 5개월 만에 아버님이 돌아가셨고 내 나이, 스무 살 가을에 어머니가 떠나셨어요. 어머니를 여읜 이듬해에 부산의 어느 허름한 거리를 거닐다가 쓴 가사예요. 사람들은 연인과의 이별을 떠올리는 가사지만, 전 어머니를 그리면서 노래를 불렀어요. 사람들이 제 노래를 좋아하는 이유가 억지로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내가 살면서 겪은 삶이 녹아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그리고 1980년 당시 최고의 여배우중의 한명이었던 김자옥과 결혼하게 됩니다.

 

하지만 둘의 결혼 생활은 불과 3년만에 이혼으로 끝나게 되죠.

 

그런데 주목할 점은 최백호나 김자옥이나 모두 이혼한지 1년 뒤인 1984년 재혼을 했고, 그 배우자와 여전히 잘 살고 있다는 점입니다.



 



김자옥과 이혼 후 최백호는 현재의 아내 손소인(이름)을 만나게 됩니다.

 

당시 손소인은 콘트라베이스를 전공하던 학생이었고, 최백호보다 10살 연하였습니다. 그리고 본가가 미국에 있었죠.

 

최백호: "아내를 처음 만난 건 친구집에서였어요. 친구 부인의 친구였는데, 저보다 10살 연하였죠. 첫눈에 ‘참 괜찮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감히’ 제 상대로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러다가 최백호는 손소인을 우연히 몇번 더 만나게 됩니다. 예식장과 백화점, 그리고 최백호가 노래하는 곳에 친구 부인과 같이 오기도 하죠.

 

그렇게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지만, 둘의 결혼을 손소인 집안에서 반대하게 됩니다.

 

 

 

최백호: "결혼하기 전 처가의 반대가 심해서 내가 물러나야겠구나, 생각했죠. 그런데 아내가 굉장히 강한 면이 있거든요. 아마 아내가 아니었으면 결혼 못했을 거예요. 결혼하고 나서도 굉장히 힘들었어요. 제가 돈을 거의 못 벌었으니까요. 고생 많이 했죠. 아마 아내가 처가 도움을 많이 받았을 거예요. 아내 덕분에 집도 사고 편안해졌죠. 저는 워낙 돈 욕심 없는 사람이고요."

 

 

 

최백호: "장인 어른이 결혼식장에 나타나지도 않았어요. 아마 저라면 끝까지 반대했을 거예요."(최백호 재혼 부인 손소인)

 

 

 

어쨌든 결혼식을 올린 후 최백호 손소인 부부는 딸 최솜을 낳습니다

 

그리고 1994년 '낭만에 대하여'를 발표하는데, 처음에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드라마 작가 김수현이 우연히 차를 타고 가다가 이 노래를 듣게 됩니다.

 

 

 

-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잊겠냐마는 

 

 

 

김수현: "차를 타고 가다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서 나처럼 늙어갈까”라는 가사에 꽂혔어요. 중년 여성이 소녀에 마음이 흔들렸다면, 중년 남성들은 ‘도라지 위스키’와 ‘실연의 달콤함’에 절대 공감하지 않을까요?"

 

 

 

결국 당시 김수현은 자신의 드라마였던 '목욕탕집 남자들'에서 장용이 이 노래를 흥얼거리게 했고, 이후 김수현의 예상처럼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납니다.

 

앨범이 무려 35만장이나 팔렸고, 지금도 꾸준히 팔리고 있는 중이죠(지금은 음원이 더 많이 나감).

 

 

 

중견 가수의 앨범 판매량치고는 가히 경이적인 수준인데, 의외로 최백호는 돈을 벌지 못합니다.

 

 

 

최백호: "제 인생을 되돌아봤을 때 가장 좋았던 시절은 50대였던 것 같아요. 다른 게 아니라 50대에 제일 돈을 많이 벌었죠. 많이 벌었다는 의미도 그나마 제 인생에서 그 시기에 돈을 벌었다는 거고요. '낭만에 대하여'가 담긴 앨범은 꽤 많이 팔렸죠. 지금도 계속 팔리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제게 돌아오는 돈은 거의 없고 수익은 거의 제작자에게 가죠. 그 앨범만 빼놓고 모두 제가 제작했는데, 그것만 그렇게 히트를 친 거예요. 제작하지 말라는 건지…"

 

 

 

최백호: "담배를 끊고 술까지 줄였더니 누구보다도 아내가 가장 좋아하더라고요. 착하고 사랑스런 아내지만, 아내 때문에 겪는 고통도 있어요. 아내가 음식 만들기를 좋아하거든요. 지난해 연말에 아내가 조리사 자격증 중에서 가장 따기 힘들다는 일식조리사 자격증을 땄는데…. 자격증을 취득하는 건 좋은데 말이죠. 매번 실습용으로 만든 음식을 먹고 평가해야 하는 고통이 만만찮아요. 어. 이 얘긴 아내가 들으면 충격인데…. 먹고 싶지 않으니 만들지 말라고 타박할 수도 없고, 그냥 실습용 음식을 열심히 먹으며 살고 있습니다. 허허…"

 

 

 

사실 돈문제와 아내의 요리 테스트외에 최백호에게는 좀 더 심각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바로 딸과의 갈등 문제죠.

 

 

 

최백호: "딸이 다섯 살 때부터 미국의 처가에 가 있었어요. 한국에 들어왔다가도 다시 공부하기 위해 나갔죠. 저는 조기 유학은 절대로 시키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요. 한창 예민한 시기를 혼자 보내면, 그 영향이 생각보다 크거든요. 딸이 어느 정도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서 2년여 살았는데, 거리를 두고 부모를 대하더라고요. 부모인 나는 멀리 있어도 늘 딸 생각을 했는데…. 씁쓸하고 가슴 아팠어요"

 

 

 

그나마 최백호는 딸 최솜이와 2년을 함께 살면서 조기유학으로 벌어진 틈을 메우는 데 성공합니다.

 

 

 

최백호: "딸과 함께 살았던 2년 동안 서로 많이 싸우고 또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렇게 치열하게 싸우고 부딪힌 후에야 딸아이와 좀더 가까워지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가 되었죠."



 

최백호 김자옥은 사이에는 자녀가 없습니다. 최백호 딸 최솜이는 김자옥과 이혼 후 두번째 부인 손소인 사이에서 나은 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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