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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공지영, 인생 지저분하게 살았네! 네번이혼! 바닥수준의 공걸레, 소설쓰는데 도움되는 경험이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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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jun1989 2021. 3. 27.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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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 작가는 뉴스에서나 책에서나 많이 듣고 많이 볼 수 있는 인물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영향력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면서 김부선 씨, 이재명 도지사 등 사건에 같이 이름이 오르락 내리기도 하다 보니 더욱 화제의 인물이 되기도 한 것 같습니다.

이런 공지영 작가가 이혼 4번 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도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한 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작가 공지영은 1963년 1월 31일에 태어났습니다. 서울에서 태어났고, 서울이 고향인 토박이입니다. 나이는 올해로 58세가 되었네요. 서울중앙여고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88년에 '동트는 새벽'이라는 단편으로 등단했죠.

 

미모로도 유명해서 젊었을 때의 사진을 보면 비주얼이 상당히 아름답고 몸매도 날씬한 작가죠. 공지영 작가 시술까지는 확인된 바 없으나 성형은 전혀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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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은 운동권 학생으로서 활동하면서도 연애를 하였고 첫사랑과 1번째 결혼을 하였습니다. 

 

이 결혼에 대해 공지영의 아버지는 반대했으나 공지영은 "아버지와 같은 부르주아가 좋아하는 사람과는 결혼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이 결혼을 강행했습니다.

 

 

공지영 작가의 첫 번째 남편은 위기철 작가입니다.

 

흔히 많이들 알고 있는 '논리야 놀자' '아홉살 인생'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역시 이 책들도 베스트셀러입니다.

 

하지만 1991년에 공지영은 전남편 위기철과 이혼하는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공지영: "결혼생활하면서 저는 (가사분담을) 하고 싶었어요. 너-무 하고 싶었죠. 저는 (민주화) 운동을 하고 또 좌파적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랑 결혼하면, 당연히 (결혼생활은) 평등하게 사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직접 살아보니... 그래서 소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가 나온 거예요. 너무 황당해서."

 

즉, 공지영의 첫번째 결혼은 가사 분담 문제, 남녀 차별 문제 등으로 실패합니다.

 

이런 당시의 공지영의 심정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에 잘 나타나죠.

공지영: "예전에 '작가와의 대화' 시간에 어떤 분이 저에게 물었어요. "왜 페미니스트냐?"라고요. 그래서 대답했어요. "만약 제가 남성작가면 이 정도 열심히 글 쓰고, 돈 벌면 마누라가 매일 맛난 밥 싸들고 작업실에 찾아 왔을 거예요"라고요."

공지영: "여자가 잘나고 돈을 많이 벌수록 죄인이 되어야 하는 우리 사회 현실이 뭔가 싶었죠. 사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가사 책임을 지는 것도 화가 났고요. 때때로 인격적 모독까지 참으면서 그 이유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했어요."

 

공지영: "물론 제 인간적 약점도 많겠지만, 그것은 모든 인간이 가졌다고 봤을 때 이유는 하나뿐이었어요. 내가 여자라는 것, 그리고 결혼했다는 것이죠."

두 번째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사 가라' 영화화 작업을 하며 만난 오병철 감독과 결혼해서 아들을 낳고 이혼을 했는데요. 그런데 공지영의 두번째 이혼사유는 바로 '폭력'때문이었습니다.

 

공지영: "저는 성장하면서 남을 때리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두번째 남편(오병철)에게 맞았지만, 그때는 남편이 딴따라인데다가(영화인인데다가) 운동권도 아니라서 그냥 제가 잘못 결혼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공지영: "난 내 인생이 너무 아까워요. 시간이 아깝죠. 제가 모스크바 가서 호텔에서 남편에게 맞고 나서도, (바로) 파란 아이섀도 바르고 혼자 모스크바 박물관에 갔어요. (남편에게) 맞은 것도 억울한데 그것 때문에 여행을 망치고 싶지 않았거든요."

 

결국 폭력이 원인이 되어서, 공지영은 불과 2년만에 이혼을 하게 됩니다. 오병철 감독은 암 투병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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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로 이해영 한신대학교 교수와 결혼해서 막내아들을 낳았지만, 이 역시 끝내 좋지 않은 결과로 끝나고 맙니다.

 

공지영의 세번째 남편 이해영은, 공지영의 말처럼 첫번째, 두번째 남편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운동권 출신도 아니었고, 영화인출신도 아닌, 유명한 학자였죠.

 

공지영: "그래서 찾고 찾은 게 좋은 학교를 나와서 안정된 직장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남녀평등 얘기를 많이 하고, 또 제 둘째 아이도 흔쾌히 받아줬고요. 결혼 전에는 얼마나 잘해줬는지, 정말 영원히 행복하리라 생각했어요.

 

공지영: "제가 주변에서 폭력적인 사람을 보고 자랐으면, (폭력에 대한) 경계심이 있었을 텐데, 교양 있는 사람은 그럴 리가 없다고 너무 쉽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지금은 교양과 폭력성이 별개인 걸 알아요."

즉, 공지영의 세번째 이혼 역시 '폭력'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죠.

 

공지영: "결혼생활 내내 거의 사슬에 묶여 살면서도 그걸 감내했어요. 귀가시간을 계속 체크당하고,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는지 꼭 얘기해야 하고. 남자들(공지영 전남편 3명)이 모두 그랬어요."

 

공지영: "마지막 결혼 때는 7년 동안 저녁 약속 한번 못 잡고 거의 아무데도 나가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제는 상대방들에게 제가 힘든 사람이었다는 것도 이해가 돼요. 제가 어느 날 태연한 얼굴로 "나, 다른 사람이 좋아졌어. 결혼할래. 이혼해줘"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그들도 정확히 알았던 것이죠."

공지영: "실제로 그런 적은 없지만 제가 그런 사람인 건 사실이에요. 남의 이목이 두려워 자기 진심을 희생하는 법이 없는, 일종의 '진심주의자'이죠."

 

이처럼 공지영은 전남편들의 잘못을 지적함과 동시에, 자신의 잘못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내세웁니다.

 

자신은 결단코 결혼생활에서 잘못한 것이 없다는 '강력한 주장'이죠.

 

한편 공지영이 3번째 이혼에 대해 솔직하게 고백하며 화재를 모으기도 했엇죠. 공지영은 지난 방송된 MBC ‘황금어장’ 1부 코너 ‘무릎팍도사’에서 “3번째 이혼을 겪을 때 아버지께서 많이 설득하셨다”고 말했습니다. 

공지영은 “아버지께서 소설가로서 살기 힘들거라고 이혼을 말리셨다. 나도 소설가로서의 생명이 두려워 7년을 기다렸다”며 “하지만 소설 때문에 불행한 삶을 살 순 없었다. 소설 못 쓰면 어때라는 마음으로 결국 헤어졌다”고 전했는데요. 그러자 강호동은 “위대한 소설가보다는 인생의 승리자가 되고 싶었던 거냐”고 하자 “소설도 행복해지려고 쓰는 거 아니겠냐.

 

보통의 주부들이 하는 걸 나에게 원했다. 서로의 생각이 달랐을 뿐이다”고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공지영은 “근데 이혼 후 닮고 싶은 여성으로 내가 뽑히기 시작했다. 안티가 많았었는데 싹 없어졌다. 선생님 너무 존경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3번째 이혼 후 겪었던 의외의 상황을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이해영 교수는 방송인 허수경과 결혼한 것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공작가는 세 번째 이혼 후로 독신으로 지내고 있구요. 그러므로 이혼을 4번 했다는 것은 낭설입니다.

 

공지영은 베스트셀러 작가였지만, 이혼 등의 경험과 특유의 가치관으로 부를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세 번째 이혼을 한 이후에 처음으로 저금을 시작했습니다.2003년 공지영은 친구들 30명 정도가 있는 지리산에 내려갔었습니다. 친구들은 대부분 집이 없습니다. 그곳에선 가장 부자인 친구가 연 70만 원을 지불하는 집에선 살고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빚도 없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었습니다. 한때는 화전을 부쳐먹기로 해 공지영이 새벽 6시 반에 시작해 약속 시간인 11시쯤에 그 집에 도착해보니 다들 자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들은 시간 개념이 전혀 없었고 알고보니 집에 시계가 없습니다는 점을 눈치챘다. 그 친구들은 게으른 배짱이들처럼 여유롭게 지내며 넉넉하지도 못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공지영도 후에 그곳에 내려가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공지영은 후에 자신이 인생을 실패하고 아무것도 없이 와도 받아줄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는 사실에 나름대로 위안을 갖게 되었습니다.

공지영은 7년 간의 공백 끝에 복귀하였는데요, 이는 아이들의 학비 등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베스트셀러가 된 후 유력 일간지와 인터뷰를 가졌습니다.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기자가 공지영에겐 "국장이 바뀌어서 특집을 하려는데요, '공지영 인터뷰를 하고 와라'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라고 말하였고, 

 

공지영은 자신을 알아봐준다는 생각에 기쁜 마음으로 인터뷰 장소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성이 다른 아이 셋을 키우고 있습니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자신의 이 발언에 대해 별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요, 다음 날 신문 가판대에선 신문 1면에 '아이 셋, 이혼 셋'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얘기가 기사로 나간 것을 보고 놀라네요. 하지만 공지영은 '이런 것들 때문에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할까봐 걱정했지만 오히려 통쾌하다'라는 생각도 가졌습니다. 이혼에 대해 공지영의 아버지는 공지영에겐 "네가 세 번 이혼하는 것은 싫지만, 네가 불행해지는 것은 더 싫다"라며 공지영을 걱정해줬고 

이 말은 용기를 내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소설가의 이미지가 중요했던 시기여서 공지영은 실의감을 느끼기도 했으나 "소설가 못하면 무슨가, 내 인생이 그것뿐은 아니다"라며 스스로를 위로하였고, 위대한 소설가보단 인생의 승리자가 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한편, 공지영은 이 기사로 인해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비난을 할 것을 우려하였으나, 사람들은 공지영이 아픔을 이기고 나온 것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사실 그동안 한국 사회는 이혼에 대하여 부정적이었습니다.

 

특히 90년대 초반까지 '이혼녀'들은 '사회적인 죄인' 취급을 당할 정도였죠.

 

그런 상황에서 공지영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1993년 작품)'는 이혼의 아픔을 가진 수많은 여성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워주었던 작품입니다.

 

또한, 공지영의 '성이 다른 3명의 아이들'을 낳고 기르면서,

 

또한번 우리 사회의 금기를 깨는 역할을 합니다.

 

공지영: "난 우리 가족이 (남편과 아이들의 아버지가 없지만) 결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혼 자체가 불행은 아니다. 부모가 얼마나 행복한지가 가족의 행복을 더 좌우하니까."

 

공지영: "더욱이 다행인 것은 아이들이 모두 엄마를 좋아한다. 큰딸아이가 하루는 그러더라. 엄마가 행복하니까 우리도 행복하다고. 그래서 지금은 아이들에게 미안하거나 죄책감 같은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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