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노래는 물론 곡을 쓰고 밴드를 지휘하는 실력파 여성 뮤지션이 제법 있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여성 싱어송라이터를 보기는 힘들었다. 음악에 관한 한 여성의 존재 영역은 어디까지나 가수에 머물렀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90년 2월 4일, 스물여덟 꽃다운 나이에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한 장덕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1978년 다섯 살 위 오빠인 장현과 함께 듀엣 ‘현이와 덕이’라는 이름으로 낸 첫 앨범에는 ‘장덕 작사 작곡집’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
당시 가요계 풍토로서는 거의 보기 힘들었던, 여자가 곡을 쓰고 노래하는 이런 재능은 언론과 팬들의 경이감을 자극하면서 ‘천재 소녀’라는 찬사를 가져왔다. 현이와 덕이는 그해 「순진한 아이」 「꼬마인형」 「소녀와 가로등」을 잇달아 히트시키며 남매 듀오로 주목을 받았다. 이때 장덕(1962년) 나이 겨우 열여섯 살의 여고생이었다. 더구나 이 곡들 상당수가 더 어렸을 적인 중학생 때 작곡해 놨던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사람들은 더 놀랐다.
장덕은 70,80년대에 활동했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싱어송 라이터로 아주 뛰어난 작곡실력을 지니고 있는데, 그녀는 진미령과 이은하, 양하영, 임병수, 김범룡 등 70, 80년대를 주룸잡았던 여러 가수들의 히트곡들을 많이 작곡해주었던 천재작곡가였습니다.
여성작곡가가 거의 전무했던 70년대에 여성작곡가 1호로서, 당대의 많은 히트곡들을 작곡해서 큰 명성을 쌓았던 장덕은
그리고 장덕은 작곡과 노래만 잘 한것이 아니라, 얼굴도 상당히 예쁜 수준급의 미인이었답니다.
그녀는 예쁜 얼굴에 걸맞게 10여편의 하이틴영화에 주연과 조연으로 출연하는 등 영화배우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과 달리 그리 유복하거나 순탄하지는 않았습니다. 1962년생인 장덕은 서울시립교향악단 첼리스트였던 아버지와 서양화가 어머니 사이에서 1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지만 부모의 이혼으로 초등학교 때부터 외로운 유년기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혼 후 동양철학에 심취한 아버지를 따라 서울 도봉산 아래 작은 사찰에 머물던 어린 장덕은 남의 집 가정교사로 일하던 오빠가 귀가할 때까지 텅 빈 방안에서 혼자 기타를 치며 외로움을 달랬습니다. 첼로, 피아노, 그림, 글짓기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장덕은 이 때문인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어설프지만 스스로 노래를 만들어 부르기 시작했죠. 하지만 불우했던 가정사 때문인지 그녀가 만든 곡들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어둡고 쓸쓸한 내용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녀의 출세작인 ‘소녀와 가로등’만 해도 중학교 3학년 여학생의 감수성이라고 하기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깊은 슬픔과 외로움이 절절히 배어 있습니다.
사춘기가 되면서 장덕의 성격은 더욱 침울해졌습니다. 급기야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으로 가출을 하는가 하면, 수면제를 먹고 음독자살을 기도하기까지 했습니다. 충격을 받은 장덕의 어머니는 딸이 어려서부터 음악에 관심이 많다는 걸 떠올리고는 오빠와 함께 ‘드래곤 랫츠’라는 듀엣을 결성해 미8군 무대에 설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녀는 오빠와 함께 ‘현이와 덕이’라는 이름으로 일반무대로까지 진출해 본격적인 대중연예인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죠.
장덕의 삶은 모두가 선망하는 스타가 된 후에도 꽤 많은 부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의 뒤편에서 남몰래 우울증을 앓고 있던 그녀는 결국 아버지의 재혼을 계기로 또 한 번 자살소동을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하이틴 스타의 자살소동은 팬들에게도 큰 충격이었죠. 동맥을 끊고 자살을 기도했던 그녀는 결국 고등학교 졸업식을 앞둔 79년 말, 국내 활동을 모두 접고 미국에 있던 어머니를 찾아 도망치듯 태평양을 건너고 말았습니다.
장덕은 유학 초창기부터 자신을 살뜰히 돌봐주던 한 재미교포와 결혼해 서서히 마음의 안정을 찾는가 싶었죠. 오랜 침묵을 깨고 ‘리 패밀리’라는 가족그룹을 결성해 한인회의 각종 행사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그 시절의 장덕은 겉으로 보기에는 누구보다 행복한 신부였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독한 향수병이 똬리를 틀고 있었죠.
결국 한국생활을 잊지 못해 힘들어하던 그녀는 2년여의 짧은 결혼생활을 정리하고 83년 10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가수로서의 재기를 모색하게 됩니다. 하지만 어린 여가수의 자살소동에 찍힌 주홍글씨는 생각보다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결국 장덕은 서라벌레코드와 3년 간 1,000만원이라는 굴욕적인 조건으로 전속계약을 맺고 ‘날 찾지 말아요’, ‘수렁에서 건진 내 딸’ 등의 노래를 발표할 수 있었습니다.
가수활동의 공백기를 극복하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장덕 역시 음반에 대한 미적지근한 반응을 통해 몇 년 사이에 완전히 잊혀 버린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실의에 빠진 그녀는 가족들에게 연락도 하지 않고 한남동에 있는 자취방에 틀어박혀 외로움을 곱씹었습니다. 그러다가 동생의 안타까운 처지를 알게 된 오빠 장현이 울산에서 찾아와 ‘현이와 덕이’를 재결성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듀엣 재결성을 기념하기 위해 85년 내놓은 음반 수록곡 중에서 ‘너 나 좋아해’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장덕은 기적적으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그녀는 1년 후 솔로가수로 독립해 ‘님 떠난 후’를 연속 히트시키는 등 다시 한 번 자신의 음악적 저력을 과시했습니다. 이은하가 불러 큰 인기를 모은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역시 장덕이 만든 곡이었죠.
하지만 운명은 이번에도 그녀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완벽해 보였던 장덕이 1990년도에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사망해서,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자신의 오빠가 자신의 가수활동을 돌보아주다가 과로로 설암에 걸렸다는 자책감과 그리고 이혼 후 홀로 살아가면서 겪게되는 외로움, 그리고 오빠병간호를 하다가 생긴 불면증으로 그녀는 몹시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병석에 누운 오빠를 대신해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게 된 그녀는 급기야 다시 우울증 증세까지 도져 외부 활동에 의욕을 잃고 말았죠.
결국 그녀는 1990년 2월 4일 약물과다복용으로 자택에서 스물아홉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장덕이 세가지 약물을 함께 먹고 죽었는데, 이 때문에 세간에서는 그녀가 자살했다는 루머도 나돌기도 했답니다.
그 당시 장덕은 자신의 친오빠가 암에 걸린 것을 무척 안타까워했으며, 오랫동안 오빠병 간호를 하면서 불면증까지 생기고,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장덕은 수면제를 먹지않으면, 결코 잠을 자지못하는 상태까지 되었다고 합니다.
주변사람들은 장덕이 수면제를 먹은 것은 불면증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있고, 기관확장제도 감기 때문에 먹었는데, 두약을 함께 먹으면서 체내에서 두약이 섞이면서 상승작용을 일으켜서, 그 쇼크로 장덕이 사망한 것이라고 합니다.
장덕이 정말 단순히 잘못된 약물복용 실수로 인한 사고사인지, 아니면 그녀가 불면증과 우울증을 이기지못하고 자살을 선택한 것인지 현재로서는 정확한 사인을 찾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세간에서는 그녀가 자살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약물복용으로 인한 사고사라고 평하고 있습니다.
장덕이 자살했는가, 아니면 단순히 잘못된 약물복용으로 인한 사고사인가는 지금도 논란이 되고있습니다.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장으로 치러진 그녀의 장례식에는 평소 그녀와 음악적 교분을 나누었던 50여 명의 선후배 가수들이 참석해 눈물바다를 이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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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이 얼마나 뛰어난 싱어송 라이터인가를 잘 보여주는 노래가 하나 있는데, 이은하가 불러서 크게 히트했던 불후의 명곡이 하나 있는데,
바로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모습처럼’라는 곡인데, 이은하의 최고의 히트곡 중에 하나이고, 80년대의 최고의 명곡 중에 하나인 이 곡은 바로 장덕이 작곡해서 이은하에게 준 곡이라고 합니다.
장덕은 우리 음악계의 수준을 뛰어넘는 당대에 가장 아름다운 멜로디를 만들어내었던 천재작곡가라는 명성을 얻고있는 가수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싱어송 라이터로서 자신의 얼굴처럼 수많은 주옥같은 명곡들을 많이 작곡해서, 대중들에게 커다란 감동과 환희를 안겨주었던 천재작곡가이자, 천재가수 장덕은 지금은 떠나고 다시 볼 수는 없지만, 그녀가 남겨놓고간 아름다운 명곡들은 우리 곁에 영원히 남아있을 겁니다.
천재들의 요절은 늘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합니다. 십여 년 전 서울가요제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또랑또랑한 눈망울의 열여섯 살 소녀는 그렇게 자신의 재능을 다 펼쳐놓지도 못한 채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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