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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미보다 선배인 하춘화, 6살 때 데뷔!‘자선공연 여왕’ 결혼과 이혼이유?자녀 없..숨겨진 안타까운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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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jun1989 2021. 3. 17.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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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춘화는 만 6세에 가수 데뷔를 했고, 1991년 최다 개인 발표회(공연)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지요. 또한 가요계 활동을 하면서 가치관이 바르고 항상 노력하는 모습이 많은 이들의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아름다운 동안 얼굴과 탄탄한 몸매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처음 데뷔를 했을 때 하춘화는 상당한 인기를 모으고 있었고, 그때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가수이기도 합니다. 대한민국 가요계에서 남자 가수로 조용필이 레전드로 꼽힌다면 여자 가수로는 하춘화였다고 할 수 있죠. 

 

10대 시절 '물새 한마리'로 전국적인 히트를 기록하며 '잘했군 잘했어, 날 버린 남자, 아리랑 목동'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고, 음반을 약 2500곡이나 낸 트로트를 대표하는 국민가수가 되었습니다.

하춘화는데뷔 당시 레코드 음반 첫인사말이 "저는 금년에 7살 된 하춘화입니다'라고 직접 육성 녹음을 해 당시 사람들에게 많은 웃음을 선사해 주었다고 합니다. 

 

현재 아이돌 가수라고 하면 재능이 뛰어나고 많은 인기를 누리고 대중의 사랑을 받는 직업으로 찬사를 받지만 70년 당시만 해도 대중가요는 '딴따라나 광대로 폄하하던 시기였다고 합니다.

 

물론 하춘화에게도 실패는 있었습니다.

 

하춘화가 어린 시절부터 활동할 때는 상반된 시선이 공존했습니다. 아직 어리고 노래를 잘 부르는 하춘화가 귀엽다는 반응과 더불어, 너무 어린 나이에 가요계에서 활동한다는 비판적인 시각이 공존했죠.

 

때문에 어린 나이에 가수를 시키는 하춘화 아버지에 대한 비난과 질타도 많았다고 하는데요. 당시 라디오 진행자가 노래를 선곡하면서 "이렇게 어린아이까지 노래를 시키다니 참 한심한 세상입니다"라고 말해 아버지와 가족의 아픔을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하춘화 아버지는 당시 눈에 뭐가 씐 것처럼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고 고백했었다고 하는데요. 딸의 천부적인 노래실력과 재능을 알아보지 못했다면 지금의 하춘화는 없었을 것이라고 하춘화 본인은 아버지를 자랑스럽다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하춘화 아버지는 "항상 최고의 재산이 생겼으니 그걸 세상과 나누라고 말씀하셨다. 더불어 가수에 대한 인식도 바뀌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 아녔을까 아버지의 용기가 참 대단하신 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아직 어렸던 딸의 재능을 좋은 방향으로 이끈 아버지 하종오(이름)의 선견지명이 탁월하네요.

 하춘화의 재능을 일찍부터 알아본 하춘화 아버지 하종오는 그녀를 서울 동아예술학원에 다니게 했으며, 거기에서 8개월 동안 노래를 배우게 한 다음에 가수로 데뷔시켰다고 하죠. 

 

그래서 였는지 지금까지 한 기부액만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200억 가량 기부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처음 열었던 콘서트 수익금 500만 원 전액을 시작으로 매 공연이나 콘서트마다 일정 금액을 기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70년대 당시 100만 원이면 서울에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고 하니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습니다.

 

70년대 하춘화의 10대 시절, 고액 소득자 1위, 문화 예술인 세금 납부액 1위를 할 정도로 소득과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하춘화 최고 전성기 시절 한번 공연 출연료가 1억씩 했을 때 그것을 하루에 서너 번씩 했을 정도라고 하니 어마어마한 수입이 들어왔을 것 같네요.

하춘화는 당시 최고 인기를 누린 만큼 많은 어려움과 생명의 위협을 느낀 경험도 많다고 합니다. 70년 최고의 인기 절정기를 누린 남진과 나훈아의 열성팬들 때문이었다고 하는데요.

 

못이 박힌 새총 세례를 받기도 하고, 시상식에서 목을 조이기도 한 과거 공개하지 못한 사연들을 이야기해 놀라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가 발생했을 때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 했는데 이 때 코미디언 이주일이 하춘화를 구출하며 병원까지 업고 뛰어가서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생명의 은인이네요..

 

당시 하춘화는 어깨에 타박상을 입었던 반면에, 이주일은 두개골이 함몰되는 큰 부상을 당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주일: "당시 밥줄 끊기겠다 싶었다."

사실 당시만해도 하춘화는 톱스타였고, 이주일은 하춘화쇼의 진행을 맡은 무명 코미디언이었죠. 그래도 극장에서만 10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상황에서 실신한 어린 하춘화를 업고 나온 이주일의 용기가 대단한 것 같습니다. 사람은 위기때 본성이 나온다고 하죠.

(사고 후 이주일은 대수술과 4개월간의 입원치료를 거쳐 건강을 회복함)

하춘화는 1981년 직업이 사업가인 정운창과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하춘화의 가수 활동 재개로 의견이 부딪혔고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이혼을 하게 되지요. 하춘화 이혼이유(이혼사유)는 아무래도 당시 여자들에 대한 선입견, 바깥 활동과 방송 활동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춘화는 이런 상처를 안고 혼자 살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재혼을 하게 됩니다. 하춘화 재혼은 1995년 남편 이인순과 했습니다.



<중학생 때부터 알았던 국장님이 자신의 오랜 친구를 소개시켜줘 중매로 만났다. 그런데 소개 이후 남편이 1년 동안 연락이 없었다. 유명세를 타는 것이 부담됐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다. 남편이 1년간 고민 끝에 그냥 부인의 직업이 가수일뿐이다라고 다시 만날 결심을 하게 되었다>

 

하춘화 남편 이인순은 당시 43세의 노총각이었습니다. 하춘화는 남편의 이런 신중하고 진중한 마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주었고, 두 사람은 6개월 간의 열애 끝에 1995년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연애 결혼 같은 경우에는 서로 조건을 안 따지지만 이건 경우가 달라서 결혼 전 호적등본, 건강진단서를 교환했다> 이렇게 신중한 결혼 덕분에 두 사람은 20년이 넘게 행복하게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늦은 나이에 재혼한 두사람에게는 아이는 없는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혼초 임신한 적은 있지만 안타깝게도 유산을 한뒤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고 하네요. 그뒤 몇번 방송에서 입양을 생각하기도 했다는 아픈 사연이 있기도 합니다.

 

하춘화에게 남편은 항상 고마우면서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든다고 공개했는데요. 바쁜 스케줄에 집안일과 가정에 소홀할 수밖에 없는데 묵묵히 참아주고 지원을 아끼지 않는 남편에게 고맙다고 합니다. (국민 가수와 사는 남편이 지고 가야 하는 부분이 아닐지 개인적인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일하는 아내에게 가장 큰 외조는 마음 편하게 일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밖에서 일할 때는 남편이 절대 전화를 안한다>

 

하춘화가 유명한 점은 그녀가 박사 학위를 가진 현역 가수라는 것입니다. <논문 자료 수집과 교열을 도와주며 용기를 준 남편이 가장 큰 힘이 되었어요. 부모님과 가족의 기대도 커서 꼭 결실을 맺고 싶었어요>



하춘화가 박사학위를 받을 때에 동료 가수들이 찾아와 축하를 해줄 정도였지요. 아무튼, 하춘화는 노래뿐만 아니라 머리도 참 좋은 것 같은데요. 하춘화 4자매 모두 박사 학위를 따을 정도로 집안 사람들의 머리 역시 대단하다고 생각되네요.

 

하춘화는 가수들의 권익 신장을 위하여 저작권법을 공부하기 위하여 법대 대학원 박사 과정에 응시를 하게 되는데요. 법대 출신이 아니기에 2년간 세번 낙방한 끝에 전공을 변경하여 예술철학을 전공하게 되지요. 늦은 나이에도 배움을 소홀히 하지 않고, 스스로 발전해나가려 노력하는 하춘화의 모습이 정말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현재까지 하춘화는 세계 기네스북에 등재된 최다 공연 가수이기도 합니다. 약 8500회가량 공연을 했다고 하니 6살부터 64세 인생에서 노래를 빼면 하춘화의 삶이 없어진다고 할 만큼 대단한 것 같습니다.

 

하춘화는 지난해 데뷔 60주년 기념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으며, 녹슬지 않은 가창력과 퍼포먼스로 대중들로부터 여전히 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하춘화가 앞으로도 지금처럼 꾸준한 활동을 해주길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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