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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린 인권변호사의 슬픔, 수.감 간통혐의로피소!'박정희 정권의 음모 조작'~76살을 일기로 굴곡의 생애를 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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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jun1989 2021. 3. 17.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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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인변호사 수감 간통혐의로피소

성이라는 개인의 내밀한 사생활과 관련된 간통죄는 사회적으로 큰 관심의 대상이었다. 정치인이나 연예인 등 저명인사들의 간통 사건은 신문 사회면을 크게 장식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민주화운동이나 야당 탄압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은밀한 사생활과 연관된 것인 만큼, 정보기관을 이용해 뒷조사를 한 뒤 간통죄로 걸겠다며 당사자를 '협박'한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이병린 변호사 간통 사건이다. 인권변호사 1세대로 대한변호사협회장을 두 차례 지낸 이 변호사는 1974년 12월25일 서울와이엠시에이(YMCA)에서 결성된 민주회복국민회의 대표위원을 맡았다. 

 

그야말로 이른바 인권 변호사의 시조격인 인물이고 누구보다 강고하게 법을 무기로 사람들을 잡는 독재에 대해 맞섰던 사람이지. 그런데 이 양반에게 묘한 일이 벌어진다.



이 대쪽같은 양반이 1975년 1월 글쎄 ‘간통죄’로 구속된 거야. 종로의 한 일식집 마담과 엮여서 말이지. 이때 이병린 변호사는 사별한 상태였다고 하고 여자 또한 남편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해.

둘이 호텔에 있었을 때 누군가가 들이닥쳐 사진을 찍었는데 (누군가는 아니라 분명 중앙정보부였겠지만) 이병린은 태연하게 여자에게 죄 지은 거 없으니 가만히 있으라고 하고 포즈까지 취해 주었대. 그런데 사실 여자에게는 별거 상태에 가까운 남편이 있었던 거지. 그리고 이 남편이 누군가에게서 상세한 정보를 받고 간통 혐의로 고발해 버린 거야.

 

간통죄로 구속되기 전날 중앙정보부원이 이병린을 찾아왔대. ““거 간통죄로 피소되셨습디다. 허허… 거 참 어르신이 참… 우리도 뭐 망신드리긴 그렇고… 민주회복국민회의 대표위원을 사퇴하는 각서 한 장이면 저희가 고소 사건을 잘 무마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이런 데에서 보통 사람과 위인의 차이가 갈린다고 생각해. 열심히 싸우고 투쟁하고 하는 건 사실 보통 사람들도 한다. 하지만 자신의 발밑이 송두리째 무너질 위기, 자신이 쌓아올린 모든 게 물거품이 될 위험 앞에서 의연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을 거야. 더구나 여자 문제 같은 자신에게는 중요하지만 밖에서 보기엔 일종의 ‘치부’가 코 앞에 들여대진다면. 하지만 이병린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해.

“대표위원 사퇴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사표를 내도 왜 정보부에 낸단 말이오.” 그리고 그는 구속된다.

 

어디 가나 모텔이 널려 있고 등산길에서도 중년 남녀가 눈 맞는 일이 많다는 요즘에도 누가 여자랑 무슨 관계가 있네 저 여자가 남자관계가 복잡하네 하면 도덕군자들이 돼서 쌍심지 돋우는 사람들이 지천인데 그때야 오죽했겠니. 대쪽 같은 변호사, 의로운 변호사, 민주화 운동의 상징 같은 변호사 이병린의 이름은 구정물을 뒤집어 쓸 수 밖에 없었어.

 

 이 변호사는 구속 23일 만에 풀려났다. 이혼소송을 취하하면 자동으로 간통 혐의 고소도 취소되는데, 이 변호사와 함께 활동했던 이돈명 변호사가 여자 종업원의 아버지를 설득해 사위에게 이혼소송 취하서를 내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로 이 변호사는 민주화운동은 물론 인권변호 활동도 중단하게 된다.





이런 사람 앞에 독재로 치닫는 박정희 정권은 눈의 가시였고 당연히 그도 박정희 정권의 눈동자에 박힌 선인장이 된다. 이 사건은 막 발족된 민주회복국민회의를 와해시키려는 데 더 큰 목적이 있었지만 ‘인권변호사 이병린’의 명예에 치명적인 상처를 안겼다. 중앙정보부는 그를 구속시키기 이틀 전에 찾아와 간통죄로 검찰에 고소가 접수되었음을 알리고 미리 준비해간 ‘민주회복국민회의 대표위원 사임서’에 도장만 찍으면 입건하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물론 이 변호사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제 보복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중정은 이 변호사가 잘 다니는 일식집 여성 종업원의 별거중인 남편을 종용해 간통죄로 고소하게 했다. 다행히 유현석 변호사의 기지와 이돈명 변호사의 신속한 대응으로 이병린 변호사는 23일 만에 풀려나왔다. 간통죄는 이혼 신청과 함께 고소해야만 성립했기에, 이혼 소송을 취하하면 간통 고소도 자동으로 취하되는 것이었다. 이런 법리에 착안한 이돈명 변호사가 그 여성의 아버지를 설득해 사위를 호통쳐서 취하서를 내게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병린 변호사는 이 사건으로 더 이상의 공식적인 민주화운동 내지 인권변론 활동을 접는다. 한말의 국적 이완용의 집안이라는 것에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올바른 삶을 살려고 노력했던 그였다. 

 

나는 참 아쉽다. 박정희 대통령처럼 권력을 이용해서 중앙정보부원을 채홍사로 부리며 “저 처자 이쁘네” 해서 자기 옆에 데리고 온 경우가 아니라면,혹 이병린 변호사가 여자의 약점을 잡아서 협박해서 몸을 요구한 사례가 아니라면, 나이 예순 다섯의 노인이 비슷한 처지로 보이는 중년의 여자와 사랑을 나눈 게 뭐가 그리 큰 일이란 말인지.

 

여기서 부인은 사별했다는 걸 굳이 말하기조차 궁색하다. 부인이 살아 있었다 해도 이병린은 그 부인에 사죄하고 책임을 지면 되는 거지 다른 사람에게나 법정에서 머리를 숙일 이유가 뭐란 말이냐. 대체 한 사람의 공적인 메시지가 왜 메신저의 사생활로 평가받아야 하고 평생을 올곧게 살아온 변호사가 그렇게 쓸쓸히 퇴장해야 했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약자와 핍받받는 자에 대한 애정이 충만한 이병린 변호사였기에 나는 이병린 변호사가 그 여인에 대해서도 삿된 마음 없이 최선을 다했다고 여기고, 짧은 사랑이었겠지만 그 둘은 둘만의 시간 속에서라도 행복했으리라고 믿어.

 

어떤 사람은 상대 여자를 “일식집의 접대부”라고 표현하던데 이건 이병린 변호사를 오히려 더 욕되게 하는 것 같다. 민주화운동하는 변호사는 사랑도 하지 말란 말이냐. 그게 ‘실수’이고 쉬쉬해야 할 문제란 말이냐. 그건 아니잖아.

 

그로부터 40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우리는 누가 이혼했다고 하면 수신제가를 논하고 40일 동안 밥을 굶는 아버지 앞에서 이혼하고 양육비 안보냈으니 나쁜 넘이라고 우기고 어디서 어떻게 뒤졌는지 월 3만원짜리 국궁을 배웠다고 그러면서 양육비 안보냈냐고 우기면서 그 심장에 날창을 찌르는 세상에 살고 있네.

 

한 사람이란 여러 면모를 지니고 그 속을 들여다본다는 건 여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 아닐 게야. 그런데 불거진 사생활의 자락 하나로 그 사람 전체를 나락에 빠뜨리고 “그런 놈이었구나?” 낄낄거리고, 전혀 맥락이 다른 사생활들을 “국민의 알 권리”랍시고 폭로해대는 자들은 정말 용서하기 어렵네. 조선일보를 비롯한 자칭 우익 꼴통들….. 정말 사람으로 보이지 않아.

 

이병린 변호사는 1986년 8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대한변호사협회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서 그의 관은 젊은 변호사들이 들었지. 이병린 변호사의 삶과 뜻을 이해하고 존경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은 ‘민변’의 단초가 된다.



그는 간통사건이 자신의 허명을 불식해 주었다며 “법적 책임은 여하간에 나의 수치임은 분명하다”고 밝히고 그해 12월 서울을 떠나 아무런 연고도 없는 경북 김천·상주·안동을 떠돌다 86년 8월21일 76살을 일기로 굴곡의 생애를 마감했다. 그의 장례는 대한변호사협회장으로 치러졌다. 이는 변협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대한변협회관 뜰에는 그의 흉상이 세워졌다.

그 흉상의 뒷면에는 그가 수안보 서울장여관에서 홍성우 변호사에게 써 보낸 편지에 적혀 있던 ‘우음’(偶吟)이란 시가 새겨져 있다. 이는 그가 후배 인권변호사들과 헤어지는 아픔을 노래한 것이다. ‘연거연래우일춘(해가 지고 해가 오면 봄이야 또 오건만)/ 백발휘처우정신(백발 흩날리는 곳에 우정 더욱 새롭다)/ 수작병로이별고(누가 병든 늙은이에게 이별의 아픔까지 안겨주는가)/ 매하분수흥고인(매화나무 아래서 옛친구와 헤어지며 손을 나누네)’

같은 편지의 하단에는 그가 쓴 시조 ‘양심수’도 쓰여 있는데, 바로 인권변호사의 마음이었다.

‘벽돌도 차거니와 인심도 어나보다/ 격장천리 소식이야 알듯말듯 하다마는/ 밤마다 잠못이루는 내 가슴이 아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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